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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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李起巽) [1879(고종16)∼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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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안식(安植), 보명은 준수(準水), 호는 금재(錦齋)·연해(淵海)·용섭당(龍攝堂). 대군의 17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3대손으로 농포(農圃) 영의(榮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안이씨 계신(桂新)의 딸이다.

배위는 나주오씨 병수(炳洙)의 딸과 김해김씨 현국(顯局)의 딸이다. 일찍이 한학을 익혀 20세 때 이미 역리와 천문 지리에 통달했고, 명성태황후 시해사건·을사조약·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침략과 내정간섭이 강화되자 광산·나주 등지에서 8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진도·완도 연안의 일본군을 습격했다. 그 뒤 장성(長城)의 기삼연(奇參衍), 의진(義陳)의 부장인 전해산(全海山) 김태원(金泰元)과 모의하여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上本將)이 되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을 가지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했다. 1908년 2월 용진산(龍鎭山) 전투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노획했다. 그 후 본진을 성문산(城門山)으로 옮겨 담양 등지로 원정하며 일본군을 습격하여 수십 명을 사살했으며, 무안군에 설치한 일본 해군기지를 100여 명으로 조직한 결사대로 섬멸했고,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뒤 고창 극오동과 노동 작전에서 분전했으나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피해가 많아 일시 의병을 해산했다. 1909년 다시 거의했으나 2월에 사촌에서 패하고 전해산 의진과 연합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중 붙잡혔으나 압송병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타서 탈출하여 금산에서 은신했다. 그 뒤 함경도를 거쳐 만주·러시아·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했다가 1915년 귀국하여 금산에서 젊은이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주고, 고종태황제와 순종효황제를 모신 숭봉전(崇奉殿)과 어필각(御筆閣)을 건립.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묘소는 충남 금산군 금산읍 장목동 경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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