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
행사 일정

[편집중]

정조(설)절사: 

- 제향일: 매년 음력 1월 1일( 설날) 11시 30분 

-제향장소: 서울 서초구 효령로 135 청권사당 


오태영당 제향

-제향일:양력3251130

-제향장소:경북 상주시 공검면 오태리795

-참고사항:같은 날 오전7시 청권사에서 전용 버스 출발

청권사 문의 할 것

DSC_3268.jpg

[孝寧大君影堂(효령대군영당)]오태리 마을 가운데 자리잡아 外三門에 自然石 담장을 설치하고

정면 3칸 (5.50m), 측면 2칸(3.30m)이며 우물마루를 깔고

맛배지붕에 화려하게 단청을 한 새 건물로 현판을 달았는데 현판이름은 影幀閣이였으나

지금은 '孝寧大君影堂(효령대군영당)으로 바꾸었다.


♣함창사당(咸昌祠堂)


1.함창사당(咸昌祠堂)


가.사당의 시말(始末)

    임진왜란으로 9대종손 성민(聖民)이 아우 각민(覺民)과 함께 대군의 위패를 모시고 영남땅 감천으로 유락한지 약 90년 동안은 사손(嗣孫)이 세(世)를이여 가묘(家墓)에서 봉사해 왔음을 짐작된다.

 함창에 대군의 사당이 처음 세워진것은 1685~87(숙종 11~13)으로 외예(外裔)10대손 리규령이 경상감사로 있을때 세워졌다.이어서 형상(衡祥)이 이판공(吏判公), 익수 태수 형제분과 더불어 여러 일가들이 협조를 얻어 위전(位田)을 마련하고 매년 2월과 8월 하정(下丁:음력매월하순에 드는 丁日)애 향사를 받들고 일가끼리 모임을 갖고 화목을 도모하였다.


■1차 중건

  1710년 (숙종 36,경인0에 이르는 동안 종중에서는 대군사당에 사액(賜額)을 청하자는 의논이 분분랬다. 그러나 사액을 청하기에는 사당이 협소하여 그 규모를 좀 키우기로 종의(宗意)에서 모아져 그해 8월에 착공하였고 일가들이 성의를 다하고 재력을 모아 착공한지 불과 두달만에 준공을 하였다.사당 중건을 마치고 고유를 올리며 강의(講議)를 열고, 시회(試會)를 겸했는데 이때 대군의 덕을 추모하고 기리는 주옥같은 글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위이안(神爲移安)과 기양서원(岐陽書院)

  1743년(영조 19, 계해)에 대군의 사판(祠板)이 과천 대군 묘하에 신축한 현 청권사로 이안(移安)하게되니 56년간 대군의 영혼이 머무시던 함창 사당이 비이게 되고, 56년간 비어 있어 사당의 형상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영남의 선비들이 사당을 가리키며 "우리 동방의 태백.우중이신 효형대군의 영혼이 머무셨던 곳"이 이럴순 없다하여 이를 양녕.효령의 두위패를 모시는 서원으로 승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 1810년(순조 10)에 비어잇던 사당을 개축. 양녕.효령의 위패를 봉안하고 기양서원이라 이름하였다.


    이 기양서원이 헐어내어 걷어버린 내력은 전해오지 않으나 고종 말엽으로 추측되어 원인은 운영난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기본 재산이 없는 상태에서 6~70년을 지방의 사림(士林)들에 의해 힘겨운 운영을 해오다가 훼철(毁撤)할 수 밖에 없는 비탄의 경지에 이른것으로 짐작이 된다.


나. 신위의 이안과 오태사당(五台祠堂)

     대군의 사판(祠板)이 함창에서 묘하로 이봉(移奉)된지 174년째 되던 1917년 봄에 다시 문경 땅 왕릉리로 옮겨졌다. 대군의 신주가 어떠한 이유로 사액사당인 청권사에서 다시 영남땅으로 뫼셨졌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해 봄에 종손의 주관아래 상주.문경의 일가들이 협조하여 사당을 신축하고 제사를 받들어 오다가 연로한 종손이 작고하니 이로부터 봉제사와 사당의 수호관리가 어렵게되어 여러 일가들이 대책을 숙의한 끝에 사당을 1932년 오태로 이건(移建)하게 된다.


▣한식절사

-제  향 일: 매년 음력 *한식날 11시 30분 

-제향장소: 서울 서초구 효령로 135 청권사당 

*한식: 동지(冬至) 후 105일째 되는 날. 양력으로는 4월 5일 무렵이다.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이다

 홍릉제향

-제  향 일:양력431130

-제향장소: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서오릉 내)

홍릉(弘陵)은 영조 대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20090814-8.jpg

정성왕후 서씨

   본관은 대구(大丘).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서종제(徐宗悌)의 딸이다. 1704(숙종30)숙종의 제4왕자인 연잉군(延礽君)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지고, 1721(경종1)경종이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어,연잉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동시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의 즉위에 따라 왕비에 진봉되었다.

   1740(영조16)혜경(惠敬)이라는 존호가 올려진 뒤 생전에 장신(莊愼강선(康宣)등이 덧붙여졌고,죽은 뒤1772년 공익(恭翼)이 추존되고,인휘(仁徽소헌(昭獻)이 추상되어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이라는 존호를 가지게 되었으며, 1778(정조2)휘호로 단목장화(端穆章和)가 올려졌다.소생은 없다.

시호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이고,능호는 홍릉(弘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에 있다.


  ▣원릉제향

 -제  향 일:양력4221130

 -제향장소:경기 구리시 인창동 산2-1(동구릉 내)

 ☞원릉(元陵)은 영조대왕과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정성왕후20090814-8.jpg

영조대왕과 정순왕후 김씨

원릉(元陵)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사적 제193. 1776년에 능호를 정하였다.왕과 왕비의 능을 쌍릉으로 나란히 두었고,각각 혼유석(魂遊石) 1()를 앞에 놓았으며,난간 중간에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을 세웠고,공간은 화문(花文)으로 장식하였다.망주석의 세호(細虎)를 우주상행(右柱上行좌주하행(左柱下行)으로 새겼으며,석상들은 왜소하다.

영조가 숙종의 교령(敎令)을 근거로 능제도(陵制度)를 정비하여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펴낸 관계로 이 능의 석물제도(石物制度)는 숙종영조연간에 정비된국조상례보편의 표본과 같다.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별검(別檢,8) 1원과 참봉(參奉,9)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효령각 봉향

-제  향 일:음력48(석가 탄신일) 11

-제향장소: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연주암 효령각

-참고사항:같은 날 오전9시 과천 향교옆 KBS 케이블카 탑승(신청자만 가능)

청권사에 문의 할 것

2000739373_S45JtBl2_hy_1.jpg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모시 바탕에 채색.세로98,가로71.효령대군의 영정은 조선시대의 대군 초상화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매우 희귀한 예이다.경기도 과천시 문원동 연주암(戀主庵)효령각(孝寧閣)에 보존되어 있다.

   도상이나 화풍 및 미감이 일반 초상화 계통과 달리 불화(佛畵)나 조사상(祖師像)계열과 상통되는 점이 적지 않다.그리고 영정도 특이하게 사찰에 봉안되어 오고 있다.이는 효령대군이 평소 불교를 숭상하고 또한 연주암에 머물며 암자를 중건했던 각별한 인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효령대군의 영정은 조선 초·중기의 실록이나 왕실의 초상화 관계 기록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그 후손인 이형상(李衡祥)1725년 상주(尙州)에 효령대군의 사당을 중건하는 상량문을 지으면서마침내 영정을 모실 곳을 쌓았다고 말했던 점으로 보아,최소한18세기 초반경에는 어떤 형태의 영정이 존재하고 있었던 듯하다.그러나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영정의 모습과 상태를 상세히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따라서 조선 초·중기의 기록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았던 영정이 어떻게18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나게 되었으며,나아가 이 연주암의 영정은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미상인 채로 남아 있다.

   다만 현전하는 연주암의 영정은 조선 후기나 말기 무렵 사찰 주변에서 효령대군의 본래 영정과는 거의 무관한 상태에서 화승(畵僧)에 의해 독립적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왜냐하면 도상이나 재료,기법 등 많은 점에 있어서 일반 초상화보다 불화와의 친연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선 대군의 존귀한 영정임에도 불구하고 올이 굵고 조직이 거친 모시를 사용하였다.그리고 배경 전체를 불투명한 회녹색으로 후채한 것도 일반 초상화에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도상은 기본적으로 대군 초상화로서의 격식을 갖추고자 한 듯,익선관(翼蟬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정장하고,지물(持物)을 손에 든 뒤 용교의(龍交椅)와 어탑(御榻)이 혼용된 듯한 특이한 의자에 정면으로 앉은 전신상[全身椅坐像]이다.그리고 목화(木靴)를 신은 두 발은 의답(椅踏)위에 팔자로 넓게 벌리고 있다.

   익선관에 날개가 없는 것이나 목 부분의 곤룡포 속에 입은 중단(中單)의 깃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그리고 황색으로 채색하여 삽금대(鈒金帶)라 생각되는 관대를 가슴과 허리에 두 개나 맨 것,또한 곤룡포의 소매와 치마 끝에 넓은 녹색 단을 댄 것 등은 현전하는 태조어진,고종어진,연잉군(延礽君)초상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특히 녹색의 단을 댄 치마 끝 자락과 소매 밖으로 노출된 중단의 소맷자락을 파도나 톱날처럼 양식화된 굴곡상으로 묘사한 것은 불화의 전형적인 표현법이 전이된 결과라 생각된다.용교의의 등받이에 녹색의 얇은 천을 걸친 것도 조선시대의 일반 초상화에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것으로서 시왕도(十王圖)나 조사상(祖師像)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이다.얼굴과 손의 표현이 전혀 현실감과 개성도 없이 관념적으로 묘사되었고,장년의 용모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이 전혀 없이 추상적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귀가 장대하게 늘어져 이상적으로 신비화된 것도 불화의 전형적인 신체 표현법이 반영되었다.그리고 이 점이 바로 이 초상화가,전래되던 효령대군의 초상화를 이모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느 시기 화승에 의해 사찰 주변에서 창작된 것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화법도 일반 초상화보다는 불화와의 친연성이 더욱 많은 편이다.전반적으로 붉은색과 녹색 및 금분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 언뜻 불화와 매우 흡사한 분위기를 강하게 풍겨 준다.얼굴은 호분기가 많은 분홍색을 배채(背彩)한 위에 물기가 많고 농담과 굵기의 변화가 거의 없는 붉은색 필선으로 윤곽선을 선묘(線描)하였다.

   그 뒤 같은 붉은색으로 코 주변과 귀 및 얼굴의 양쪽 가장자리 부분을 약간 우려서 간략한 명암을 표현하였다.그러나 명암 표현 의식이 매우 박약하고 지극히 관념적이다.눈썹과 수염의 필선은 매우 필세가 있고 세련되었지만,기본적으로 매우 규격화되고 양식화된 필선을 단순하게 반복한 형태이다.

입술은 매우 작고 굴곡이 심한 편이며 외곽선도 없이 연지만을 후채하여 표현했다.익선관은 농묵(濃墨)과 중묵 필선으로 윤곽선과 세부 형태를 선묘하고 금분을 칠했다.그러나 금분은 거의 박락되고 흔적만이 일부 남아 있다.

   곤룡포는 중묵과 담묵(淡墨) 필선을 사용하여 곡선 중심으로 묘사하였으나 옷주름의 형태가 다소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그리고 붉은색과 녹색을 후채한 뒤 주름선 주변과 사방의 가장자리 부분을 먹으로 약간 우려서 간략한 명암을 표현하였다.

    그 다음 어깨·허리·무릎·치마 부분에 금분을 사용하여 용문(龍文)을 선묘하였다.용문의 선묘는 속도감이 강하고 굵기의 변화도 풍부하여 세련된 기교가 느껴진다.손은 분홍색을 후채하고 붉은색으로 선묘한 뒤 먹선으로 일부를 강조했고,중단의 소매에는 흰색을 칠했다.

    지물은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농묵 필선으로 선묘한 뒤 황토색을 칠하였다.의자는 농묵의 먹선으로 기본 형태를 선묘한 뒤 갈색과 청색 및 녹색을 후채하였다.그리고 용을 조각한 부분에는 금분을 칠했으나 금분은 거의 박락되어 흔적만 남았다.

   의답은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순한 형태인데,반우향의 측면관(側面觀)으로 묘사되어 정면관(正面觀)의 신체나 의자와 투시법상 심각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그 결과 좌측면의 밑변을 묘사하지 못하고 생략한 상태로 남겨 놓고 말았다.모시 바탕이 헤어지고 채색에 박락된 부분이 많아 보존 상태가 다소 좋지 않은 편이다.지금은 액자 표구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발취/


효령대군 기신제

-제향일:음력5111130

-제향장소:서울 서초구 효령로135청권사당(방배역4번 출구)

uuid53afff9e1d4b4a539bb95c2769826de6-thumb(800,5000).jpg

    부부인 해주정씨 기신제

      -제향일:음력8251130

      -제향장소:서울 서초구 효령로135청권사당(방배역4번 출)

효령대군.부부인 묘제

-제향일:음력1051130

-제향장소:서울 서초구 효령로135청권사내 묘소(방배역4번 출구)

사진 053.jpg

▣중추(추석)절사: 

- 제향일: 매년 음력 8월 15일( 추석) 11시 30분 

-제향장소: 서울 서초구 효령로 135 청권사당


평해손씨제향

-제향일:음력1081130

-제향장소:경기 양주시 백성읍 방성리 산192안강도정 재실

평해손씨는6자이신 안강도정 모()이심


▣동지절사

- 제향일: 매년 음력 *동짓날 11시 30분 

-제향장소: 서울 서초구 효령로 135 청권사당

 *동지(冬至)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동지선(남회귀선) 곧 황경(黃經) 270도의 위치에 있을 때이다. 그래서 양력 12월 22일이나 23일 무렵에 든다.


☞절사란?


정의

설날에 묘소에 가서 지내는 제사. 정조절사(正朝節祀)·원단절사(元旦節祀)라고도 한다. 설·한식·단오·추석 등 명절에 지내는 제사라 하여 절사(節祀, 節祠)라 하는데, 넓은 의미에서 명절에 지내는 묘제(墓祭)와 차례(茶禮)를 총칭하기도 하며, 좁은 의미에서 묘제만을 뜻하기도 한다.


▶내용

   설날은 새해 첫 날이라 하여 국가에서 종묘(宗廟)와 각 능원(陵園)에서 제향을 하였고, 민간에서도 이를 따라 술, 과일, 포 등의 음식으로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려말 이후 주자의 『가례(家禮)』가 사대부들의 윤리규범서로 수용되면서 사당(祠堂)에서 예를 행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묘제는 3월 상순에 날짜를 정해서 하도록 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묘소를 중시하여 고려 때부터 설·한식·단오·추석 등의 속절(俗節)에 조상의 묘를 돌아보는 풍속[上墳]이 있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가례』에 의거하여 사당에서의 예와 사시제(四時祭)를 강조하고 명절에 행하는 묘제를 폐지하도록 하였으나, 이언적(李彦迪)이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설·한식·단오·추석에 모두 묘소에 가서 배소(拜掃)를 하니 지금 모두 폐지할 수는 없다. 이날 아침 일찍이 사당에 가서 시절 음식을 올리고, 이어 묘소에 가서 술을 올리고 절을 해도 괜찮다.”고 하여, 명절마다 묘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사시(四時)마다 묘제를 지내는 것이 가묘에서의 사시제와 차등이 없으니 미안한 듯하다. 마땅히 한식과 추석에는 『가례』 묘제에 의거하여 제수를 갖추어 축문을 읽고, 산신제를 지내야 하며, 설과 단오에는 간략하게 제수를 갖추어 단헌(單獻)을 하되, 축문과 산신제를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이는 설 묘제의 축문에 “청양재회(靑陽載回)”라 하였고, 신의경(申義慶)과 김장생(金長生)은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 설 묘제의 축문에 “세율기경(歲律旣更)”이라 하여 해가 바뀌었으므로 추모의 정을 펼치고자 묘제(절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가례』에서 큰 제사로 여기는 사시제(四時祭)와 사명일(四名日)에 행해 오던 성묘의 관습과 『가례』의 묘제가 함께 행해지면서, 이를 절충하여 사명일에 4대 조상에 대해 지내는 묘제는 절사로, 한식 또는 10월 초하루에 5대조 이상의 조상에 대해 지내는 묘제는 세일사(歲一祀) 또는 관행적 시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에 이재(李縡)는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 “세상에서 다만 묘제만을 행하고 사시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여, 사절일에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묘제는 일년에 한 번만 지내도록 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도시 풍속에 묘소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절사’라 하고, 설·한식·단오·추석 등 사명일에 행한다고 하였다. 이날 술, 과일, 포, 식혜, 떡, 국수, 탕, 적의 음식으로 제사 지내며, 집안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한식과 추석에 가장 성행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명절에 산소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조정에서는 여기에 동지를 더하여 다섯 절사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절사가 주로 한식과 추석에 성행한 것은 절기상으로 봄과 가을이 계절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므로 이때 지내는 제사가 중히 여겨졌다. 하지만 설날은 추운 겨울이어서 묘제를 지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설은 점차 『가례』에서 규정한 정지(正至)·삭망(朔望)·속절(俗節)의 의미로서 사당에서 차례만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설과 단오에는 사당에서 차례만을 지내거나 차례를 지낸 후에 성묘를 했다. 그리고 한식과 추석에는 사당에서 차례를, 묘소에서는 절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화살표TOP